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토니오 그람시 (문단 편집) == 생애 == 1891년 1월 22일 [[이탈리아 왕국]] 남부 사르데냐 알레스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으며, 이 때 척추를 다쳐서 키가 150cm 정도에 멈췄다.[* 후일 그람시가 상당히 유명해진 후, 그의 실물을 본 적 없던 사람이 그람시가 인사했을 때 "그럴 리 없어, 안토니오 그람시는 거인이라야 해. 이렇게 작지 않다고!"라며 절규했다는 에피소드가 그람시가 쓴 편지에 나온다.] 사고의 영향이었는지 평생 몸이 병약한 편이었는데, 어렸을 때는 밤에 자다가 죽으면 바로 장례를 치르려고 어머니가 매일 정장을 입혀서 재웠다고 한다. 심지어 외모도 볼품없었기에 [[코민테른]]에서 그를 대중간부로 세우기 주저했을 정도. 그렇게 허약한 신체를 가졌으면 실내에서만 [[히키코모리|히키]]로 지낼 법도 한데, 그의 집안이 가난한 데다 먹여살릴 식구는 또 많아서 11세 때 학교를 중퇴하고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독학을 이어간 끝에 장학금을 받아 [[토리노 대학교]]에 진학하여 인생이 피나 했는데, 다시 나쁜 건강이 그의 발목을 잡아 시험 몇 번 보고난 후 대학생활을 포기했다.[* 이탈리아의 대학은 학년제가 아니고 시험이 전부 통과되어야 졸업. 참고로 대학 시험을 치면서도 몇 번 기절했다.] 그런 본인의 상태와 어울리지 않게 키 큰 러시아 미인 바이올리니스트와 혼인에 성공, 이번에야말로 인생의 승리자가 되나 했으나... 시대가 불운하게도 그람시는 신혼 초부터 정치생활하느라 바빴고, 나중에는 투옥되어 영영 가버린 바람에,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은 그람시와 떨어져 계속 러시아에서 살아야 했다. 1913년 [[이탈리아 사회당(1892년)|이탈리아 사회당]]에 입당했다. 입당 후엔 [[토리노]]의 노동자들을 이끌어서 이탈리아 사회당 내 좌파 세력을 결집했다. 대학 중퇴 후 사회당 기관지인 아반티 토리노 지국에 입사했는데 당시 토리노 지국장은 [[베니토 무솔리니|무솔리니]]였다.[* 그 [[베니토 무솔리니]]가 맞다. 2차대전 시기 파시스트로 활약한 인물들 중에는 1차대전 종전 후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다 파시즘이 대두되자 전향한 인물들이 많다. 후에 그람시가 무솔리니에게 죽는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인연.] 거기서 이런저런 내부 갈등을 겪다 때려치고 나와 1919년 [[이탈리아 공산당]]의 기관지 신질서를 창간한다.[* 이때 [[블라디미르 레닌]]의 발기로 조직된 [[코민테른]]에도 가입했다.] 1921년에는 아마데오 보르디가[* [[이탈리아 공산당]]의 초대 서기장. 당내 좌파로 분류되었으며 공산당 창당의 주역이었으나 그람시의 공장평의회 전술을 비판하였고 대중과 당의 관계 설정에 있어 그람시와 대립하게 된다.]와 함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인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립한다. 동지들이 기고한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싸늘한 표정으로 "이것도 글이라고 써 왔느냐"라고 반문하는 냉혹한 편집장이었다고. 애초에 마르크스도 그렇고 이 시절 마르크스주의 글쟁이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신랄한 편이긴 했다. 그러나 편집을 마치고서는 젊은이들과 즐겁게 산책하면서 토론하는 사람이었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파시스트]] 정당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그람시의 정치상 라이벌인 아마데오 보르디가는 파시스트 정당을 듣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떼로 잡혔는데 좋은 말발 덕분에 배심원을 녹여서 나왔다.] 그에 비해 그람시의 이탈리아 공산당은 활발하게 반파시스트 운동을 벌였다. 일례로 의회에서 만난 무솔리니가 그람시와 친한 척해 보겠답시고 악수하려 손을 내밀었을 때 냉랭하게 무시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이탈리아 공산당에 질릴대로 질린 무솔리니 정부는 결국 [[일당제|파시스트 국민당 외의 모든 당의 정당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공산당의 리더인 그람시를 투옥시켰다. 이때 신질서 창간 동기 중 움베르토 테라치니를 비롯해[* 팔미로 톨리아티는 모스크바에, 안젤로 타스카는 프랑스에 있었다.] 공산당 주요 인사 20여 명이 함께 투옥되는데 그것이 1926년이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창립된지 딱 5년 후 일어난 일. '''"우리는 이 자가 20년 동안 두뇌를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 담당판사로부터 이탈리아에서 가장 위험한 두뇌라는 평을 받았다.]라는 말과 함께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옥중에 가둬두니 오히려 두뇌를 더 활발하게 쓰면서''' 왕성한 저술 활동을 벌였다. 대표작은 《옥중수고》로 총 29권, 2848페이지에 달한다.[* 1948년부터 일부 간행되기 시작했고 최초 편집본은 신질서 동인인 팔미로 톨리아티 판본이다. 현재 널리 알려진 것은 75년 제라타나 판본. 그람시의 저작으로 출판된 것의 대부분이 이것의 발췌본이다.] 그렇게 감옥 내에서도 뼛속까지 공산주의 혁명가였던 그람시는, 애초에 좋지 않았던 건강 상태의 악화 끝에 뇌출혈로 1937년에 사망하고 만다. 1937년은 그가 투옥당한지 11년째 되는 해. 무솔리니는 뭐가 두려웠는지 그람시의 사망이 완전히 확인되고서도 며칠 뒤에야 그람시의 사망을 공식 발표한다. [[이탈리아 사회당(1892년)|사회당]] 입당인 1913년부터 그의 이탈리아에서의 본격적인 혁명가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본다면, 그 중에 13년을 감옥 밖에, 11년을 감옥 안에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세계에서 행동 반경이 가장 좁은 혁명가가 아닐까 추정된다. 그러나 짧은 자유생활동안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에도 참가했고(그 때 아내를 만나서 혼인) [[빈(오스트리아)|비엔나]]에도 들락거렸으며, 무솔리니가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을 무렵에도 열심히 도망다녔다. 그가 감옥 안에 있지 않았더라면 역사가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모를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